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양평 용문사 그리고 은행나무(2015-11-2)
용 문 사
신라 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노전,칠성각,기념각,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 선걸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전, 삼성각,범종각,지장전,관음전,요사,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 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안내문)
* 작년에 이어 노랗게 단풍든 용문사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 50분쯤 걸리는 그곳을 향해 9시쯤 집을 나섰다.
아직 10시 전인데다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한산하다.
용문사로 가는 길가의 은행나무는 작년처럼 잎이 몽땅 떨어졌다. 또 늦게 왔나보다...
매표소 직원한테 물었더니 올해는 아직 잎이 안떨어지고 거의 물들었다고 한다.
요것저것 묻는 내게 오늘 아침에 다녀왔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1킬로 되는 용문사로 가는 길가의 단풍도 작년보다는 적기인걸로 보아 조금 안심이 된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단풍이 이쁜곳을 자꾸 잊어버리고 강천산까지 갔는데 헛수고 한거에 비하면
오늘은 노력대비 수지맞은것 같다.
아 늦지는 않았구나....
나무가 크다보니 떨어진잎 1/3, 노란잎 1/3, 초록잎1/3 전부 노랗게 물든걸 보고 싶은건 어쩜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가 크니까 지 그늘에 가려서 뒷쪽은 초록잎이 많은데, 이쪽까지 노랗게 물들면 양지족은 아마도 떨어질것 같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동양 최대의 용문사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재위)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 (625~702)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복이라고도 불렀으며,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으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안내문)
양평의병 전투지- 용문사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
하여 상원사,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앟여 일제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명 제52년대 제9중대와 용문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안내문)
가는 뒷모습을 단풍처럼 아름답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