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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공원과 삼청각, 길상사

소보님 2018. 1. 20. 09:34






우중 삼청공원,삼청각과 길상사(2015-11-18)
 
 
 
늦가을 단풍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서 트래킹을 다녀왔다.
이곳은 삼청공원...
가뭄에 단비라 내리는 비가 고맙지만....
카메라가 젖어 애먹은 하루다.



말바위 쉼터에서 내려다 본 북쪽서울






삼청각






시대가 참 좋아졌다...
이렇게 삼청각을 드나들수 있으니....
더구나 조카의 애기 돌잔치로 밥도 먹어보는 경험도 했으니....출세한거다. 








이곳은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는 길상화라는 여자의 이름을 따 만든 절이라고 합니다.
길상화는 법명이고  본명은 김영한인데...
김영한은  기생출신이였으나   사업수완이 좋아서 당대 최고의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되었다고해요^^ (인터넷)










김영한(길상화)는 어떤 여인이였을까?
가세가 기울어   15세에 병약한 남편에게 시집가서   힘든 시집살이를 하였는데...
김영한이 빨래를 할때  남편이 우물에  몸을 던져 빠져죽었다고 하네요.
청상과부가 된 김영한은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네요.(인터넷)









그리고 돈을 모은 김영한이 지금의 길상사인 대원각을 사들여 요정을 열고,
3공화국 시절에는 정부 주요 인사들의 단골요정으로 유명했다고 하네요.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스님에게 10년이나 부탁하여 시주한, 대원각은
당시 시가 약 천억에 달하는 요정이었다고 해요.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반한 김영한은 로스엔젤레스에서 만난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하겠다 했지만
 법정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고 해요.
 
김영한이"시주를 받아주세요, 스님" 하면 법정스님은 "시주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보살님" 하면서 10년이나 승강이를 벌이고,
 그러다 결국 법정스님이 개인 명의가 아니라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받게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10년의 실갱이가 있고나서 1997년 10월 길상사가 개원하고, 김영한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창건법회에서 길상화 보살이 말하길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기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때 인터뷰에서 천억이나 되는 땅을 시주한 것이 혹 아깝지는 않으신지,
 어떤 마음으로 시주하신건지 묻자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 일을 한 것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별 일 아니다"라며,
 "내 가진 모든 것이 그이(백석)시 한 수만 못 해"라고 말했다고 해요.
 실제로 99년 11월 13일 길상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김영한은 다음날인 11월 14일 육신에서 벗어나 길상사
길상헌 뒷쪽 언덕에 뿌려졌다고 해요.(인터넷)
 






처음으로 와본 길상사....
이곳은 법정스님께서 마지막까지 머물던 곳입니다.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맘에 드는 곳입니다






법정스님 유골 모신곳이란 표말이 있습니다.
어둡기도 하지만 저도 모르게 떨린 모양입니다. 사진이 흔들렸습니다.
달랑 한장 찍었는데 말입니다.






길상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에 안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고즈녁하고...









김영한(길상화)는 어떤 여인이였을까?
가세가 기울어   15세에 병약한 남편에게 시집가서   힘든 시집살이를 하였는데...
김영한이 빨래를 할때  남편이 우물에  몸을 던져 빠져죽었다고 하네요.
청상과부가 된 김영한은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네요.(인터넷)